일반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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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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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말 기준
| 행정구역 | 면적 | 인구 | 세대수 |
|---|---|---|---|
| 51통 321반 | 4.75㎢ | 56,920명 (남 28,117명, 여 28,803명) | 22,980세대 |
교육시설
- 초등학교 4개교, 중학교 5개교, 고등학교 4개교, 특수학교 1개교 ☞ 세부현황[클릭]
공공복지시설
- 복지타운 1개소, 경로당 38개소 ☞ 세부현황[클릭]
행정복지센터 행정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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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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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민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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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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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형복지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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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에서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인감증명서 발급 신청(대리)
- 인감(개인) 신고 (본인)
- 인감신고 (재외국민)
-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
- 주민등록증 말소자 등·초본 발급
- 주민등록 재등록
- 주민등록 분실신고 및 재발급
- 주민등록 정정(말소) 신고
- 출생신고
- 사망신고
- 전입신고
- 주택임대차계약서 확정일자 부여
- 납세완납증명서 (지방세납세증명)
- 지방세 미과세 증명
- 자동차 시세완납 증명
- 재산세 과세증명 (세목별 과세증명)
- 민방위 교육
- 기초연금대상자 신청
- 국민기초 생활보장 수급자 신청
- 장애인 등록 신청
- 공공근로신청
- 농지원부 작성 등본발급업무
비전2동 유래
비전2동
비전동 일부지역과 소사동이 조선조에 양성현 영통면(令通面)이었고 용이동은 양성현 구룡면(九龍面)에 속해져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양성현이 없어지면서 안성군 원곡면으로 편입된 후 1983년 2월 11일 평택군 평택읍 관할로 되었으며 이후 1986년 1월 1일 평택시로 승격되었고, 2019년 9월 30일 용이동 일부가 분동되며(용죽지구 제외), 현재의 비전2동 관할구역이 되었다.
문화촌(文化村)마을
한국전쟁이후 생긴 마을로 그 당시 피난민에게 난민 정착사업지로 이 지역 일대를 개간 정착하도록 해 많은 피난민이 모여 살면서 난민촌으로 부르다가 이후 문화촌으로 바꾸었으며 상신작로(上新作路)는 1914년 이후 평택∼안성간 신작로가 개통된 후 안성방향 신작로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신작로라고 하였다. 어인남(於仁南)마을은 덕동산과 매봉산 가운데 있는 마을로서 남쪽에 탁 트인 곳에 있다하여 넓은 뜻을 지닌 어인(於仁)자와 남녘 남(南)자를 사용해 어인남이라 했으며 또한 계해년(癸亥年)에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곡물을 출자하여 마을 계(契)를 만들면서 계인(癸仁)마을이라고 하였다.
소사(素砂)마을
평평하고 넓은 들이어서 소사라고 했으며 소사평야도 소사 앞 들판에서 시작하여 포승면까지 그 길이가 백리 길이 되어 이 마을의 이름을 소사평야의 소사를 따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죽골
지형이 소가 죽을 먹는 형국에 마을이 있다 하여 소죽골이라 하였고 또한 소사 장터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직골(西直谷)이라기도 불렀다고 하며 솔밭말(松田)은 야산 한가운데에 소나무가 무성하게 있는 마을이라하여 솔밭말로 지칭했고 창말(倉말)은 예전에 조수(潮水)가 드나들던 선착장이 있는 마을로 공물(貢物)을 저장하기 위해 창고가 있었다하여 창말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소사원(素砂院) 또는
원소사(院素砂)
예전에는 삼남대로(三南大路)변 소사에 있는 역원(驛院)으로 숙식시설과 교통의 요지로 자리를 잡았으며 소사원 앞쪽으로는 조선 효종때 영의정 김육이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것을 기념해 "대동법시행기념비"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소사장(素砂場)은 소사원 동쪽에 섰던 5일 10일장으로 예전에는 대장간 마굿간 및 갖가지 생활필수품 곡물등이 거래되었다고 전한다. 이와 함께 역사적으로 유명한 소사벌싸움(素砂會戰)이 기록되고 있는데 조선 선조(宣祖) 30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가 소사벌(素砂坪)에서 왜장 구로타의 군사를 무찌른 싸움으로써 평양성싸움 행주대첩과 함께 육전 3대첩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용이(龍耳)마을
백운산(白雲山)으로부터 아홉 개의 산맥이 동.서쪽으로 뻗어 내려와 동쪽은 용의 머리와 같다하여 용두(龍頭)마을로 불려졌으며(현재 안성시 소재) 서쪽에 있는 마을은 용의 귀 언저리에 해당된다하여 용이(龍耳)마을이라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은 이름이다.
구룡동(九龍洞)
백운산으로부터 동남향으로 뻗어 내려오는 아홉 골짜기를 굽이굽이 돌며 마치 아홉 마리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는 형국으로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구룡동 또는 구룡골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곡물 대여기관이었던 사창육고(社倉六庫)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며 현촌(玄村)마을은 예전에 현씨(玄氏)가 많이 살고 있어 현촌마을이라고 하며 신흥동(新興洞)은 1975년에 생긴 마을로서 새로 부흥하는 마을이라고 신흥동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