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대한민국 신성장 경제신도시 평택

도시숲 나무심기 시민과 함께 하겠습니다.
검색전체메뉴펼침

역사문화

우리어렸을적엔!

우리어렸을적엔!

  • 역사문화
  • 신장지구고향전시관
  • 골목,우리네숨결
우리 어렸을 적엔...

신장동과 서정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왔던 어르신들이 간직한 어릴적 이야기와 소소한 추억들을 모아 엮어보았습니다.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반편성이 있겠습니다.
갓 쉰 되신 청년분은 5학년 이시구요.
예순 넘으신 장년층 분들은 6학년 되시겠습니다. 어린시절로 돌아보기엔 딱 좋은 반이죠?
자, 오늘만큼은 오학년, 육학년으로 돌아가 봅시다!

철길을 놀이터 삼다 : 물자 수송 철도

물자 수송 철도 사진

신장동의 오른편에 찰싹 붙어 동과 서를 가르는 철길이 있다. 미군부대로의 물자수송을 담당했던 수송 철도의 일부다. 이제 그 쓰임이 없어져, 주에 두어 번 행사처럼 전철이 운행 될 때를 제외하면 철로는 주민들의 산책길이나, 간이주차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은 퇴물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저 철로에 한 시간도 멀다하고 쌩쌩 기차가 달리던 때가 있었지." 이제 갓 5학년에 입학한 김씨(51세)는 그렇게 회상을 시작했다.

그가 어릴 적에 철길은 '놀이공원'이었다. 하교 길에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모이면 항상 향하던 곳이 철길이었다. 소년들은 철길앞에 모이면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걸로 모임을 시작했다. 오는 길에 줍거나, 모아온 못 들을 자잘하게 늘어놓으면 놀 준비는 끝이다. 놀이가 별 거는 없었다. 철길 위에 못을 올려놓고 그 위로 열차가 지나가 길 기다리는 것 뿐.

차례차례 늘어놓은 소년들은 기찻길 옆에 옹기종기 엎드려서 못 들의 최후를 지켜보곤 했다. 매번 하는 놀이였지만 기차가 달려올때면 바닥이 쿵쿵 울리는 박자에 맞춰 심장이 두근거렸고, 기차가 코앞까지 다가오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지않고서는 못 배겼다고. 지금의 롤러코스터에 그 스릴을 비할까?

기차가 쌩하고 지나가면, 올려 둔 못들은 대부분은 속도에 못 이겨 튕겨져 날아가고 한두 개만 기차에 깔려 아주 납작하게 되곤했다. 기차가 지나간 후, 주우러 가면 마찰로 후끈하게 달아오른 못에 손을 데기도 몇 번. 사이에선 얄팍한 판처럼 된 못을 가장 일급으로 쳤다. 보물로 삼아 자랑거리가 되곤 했는데, 사실, 찌부러진 못에 별 쓸모는 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 해 보면 훈장은 뭐 쓸모가 있어서 장교들이 달고 다녔던가. 그렇게 따지면, 찌부러진 못의 개수가 소년들 사이에선 훈장의 개수나 다름없었다.

크림빵의 마성이 무너지다 : 미군부대의 케이크의 맛

이제 5학년에 들어 선 분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당시, 전국의 아이들을 가장 열광하게 했던 음식을 꼽으라면 '삼림 크림빵'이 되시겠다. 1964년 첫 출시된 크림빵은 그때 10원 정도의 가격으로 우는 아이를 뚝 그치게 하는 데에 묘약으로 쓰였다. 이러한 대세 속, 이 크림빵의 마성에 넘어가지 않는 극소수의 아이들이 있었으니 그 주인공 중 한명인 김모씨의 이야길 들어보자.

"크림빵보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케이크와 과자를 먼저 먹었죠. 그러다보니 애들이 선심 써서 내놓은 크림빵을 먹어봐도 '별게 아니다' 싶었습니다."

요즘에야 한 골목 지나면 하나씩 있는 게 베이커리, 제과점이지만 당시엔 제과점이라고 하는 게 없었다. 케이크는 부대에서 나왔다. 미군부대에서 나왔지만 사온 것은 아니었다. 케이크는 부대에선 폐기품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렇다. 실상은, 미군들이 먹고서 남긴 케이크였다. 그러나 절대 더러운 건 아니었다. 깨끗한 부분만 남겨 놓고 보면, 조각케이크와 다를 건 또 무언가. 근방의 아이들은 샤르르 녹는 스폰지 케이크 맛에 입이 길들여졌으니 크림빵이 입맛에 안찰만도 했다.

케이크 장사가 잘 되자, 여기저기 미군부대 식품 가게가 차려졌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앞 불량식품 가게 일 것이다. 씹어도 안 씹히 는 쫀득거리는 젤리와, 구슬모양의 캔디, 가지각색의 막대사탕 등은 아이들의 눈과 혀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저울로 달아 무게로 팔았는 데, 신문지로 만든 봉지에 담아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달콤하게 혀 안에 감기는 그 맛! 불량식품을 따지는 지금과는 달리 그땐 없어서 못 먹었지. 주머니에 잔돈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가게 앞을 허투로 지나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꼭 돈이 있어야만 군것질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학년 4반인 이모씨는 ABCD 과자를 서리하던 추억이 있다. 등하교 길에 지나치는 부대철로 옆 골목에 과자 도매상이 있었다. 지금이야 ABCD과자 하면 초콜릿을 떠올리겠지만 그 땐 알파벳 모양의 과자였다. 미군부대에 보급되던 것이었다. 요즘은 건빵도 비닐봉지에 곱게 포장되어 팔리지만, 당시엔 물자가 부족한 때라 나무상자에 한가득 담아놓고 한 됫박 씩 팔곤 했다.

지나칠 때마다 그 고소한 건빵 향내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입 맛만 다시고 지나 다닌게 일상, 그러던 어느 날, 나무상자의 틈새로 A의 끄트머리가 나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욕심이 안날 리가 있나. 배는 왜 그렇게 고팠는지.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들더라. 주인 몰래, 슬그머니 다가가 단숨에 A를 뽑아들었다. 정말 A, 하나 먹을 생각이었는데 막상 잡아당겨보니! 이게 왠 떡? 손바닥에 B며 C며 알파벳이 쏟아지더라. 사과 박스 안에 빼곡하게 부대낀 과자가 틈이 생기자 뭉텅이로 나온 것이다. 그때 기분? 째진다는 말은 여기서 써줘야 한다. 그 이후로, 이모씨는 초등학교 졸업 무렵까지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그 가게 앞을 서성이셨다고.

대보름의 망우리놀이와 미국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

1950년대 초, 길게 뻗은 톨게이트 하나를 제외하면 근방은 아직 모두 논밭이었다.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달라졌다. 미군기지가 들어서고, 바삐 움직이는 용역들에 의해 비행장이 깔렸다. 미군기지 정문 앞 길은 양 옆으로 하꼬방이 늘어서기 시작했고, 미군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 아이들은 "김 미 더 쵸콜릿"을 외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점차 기지촌이 커져갈 동안에도, 아직 주변은 한동안 농촌 풍경으로 머물러 있었다.

농촌과 기지촌을 동시에 간직했던 모습은 당시 아이들의 기억 속, 망우리놀이와 불꽃놀이로 기억에 남아있다.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는 망우리놀이는 음력 1월 15일 대보름날 이루어졌다. 어른들은 병해충과 잡초를 막고자 논둑과 밭둑에 불을 놓았다. 밭이 바싹 타 들어갈 동안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것이 망우리놀이다. 망우리놀이는 긴 철사를 이은 깡통에 구멍을 숭숭 뚫고 짚단 을 넣어 불을 당겨 올린 후, 힘껏 돌리는 놀이였다. 망우리라는 말이 깡통에 숭숭 구멍을 뚫어놓은 모습이 망과 같다 해서 온 것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실제로는 놀이를 하며 "망월-정월대보름-이여!"라고 외치는 소리 때문에 왔다고 한다. 밤에 오줌 싼다고 금지되었던 불놀이가 대보름날, 망우리놀이만은 허용이 되었다. 초가집이 대다수였을 때라, 튄 불똥에 초가집 지붕을 태우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기지촌의 모습을 보여주는 불꽃놀이는 양력 칠월 사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이루어졌다. ○○님의 말씀으론 "다른 지역보다 볼거리, 들을 거리가 많았던 동네지만, 어릴 적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불꽃놀이였다"고 한다. 7월 4일 미국 독립일은 미군부대 안 만이 아니라 길거리까지 모두 축제분위기였다. 특히 그 날만큼은 미군들의 인심은 후해서, 아이들에게 캔디나 과자를 아낌없이 나누어주고는 했다. 아이들은 미군들을 쫓아다니며 달짝지근한 캔디를 한주먹 씩 얻어가곤 했다. 무엇 보다 백미는 밤에 벌어지는 불꽃놀이였다. 한두발이 아니라 수십 발이 넘게 쏴 올렸는데 그 숫자에 의미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몇 주년인지에 맞춰서 쏴 올렸던 거더라고, 100주년이면 백 발. 160주년이면 백육십 발." 머리 위로 팡팡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모두 옥상으로 달려 올라갔다."그땐 옥상이라 그래봐야 일층, 이층 옥상이었지." 한발 한발 불꽃을 쏴 올릴 때마다 소리를 질러가며 보았던 순간이 기억에 생생하다.

공공누리 출처표시 허용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 도시재생과
  • 031-8024-4130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