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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신장동

신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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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장지구고향전시관
  • 마을의 유래

신장동의 발자취

신장동은 진위천 남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경사가 극히 완만한 낮은 구릉지를 이루고 있으며, 서정동과 지산동에 인접해 있다. 신장1동은 제역, 남산(남산터), 목천, 구장터 부락에서 발전되어 왔고 신장2동은 신장, 밀월, 송월, 부락에서 발전되어 왔다.

신장동은 조선시대 진위현 탄현면에 속하였다가 1895년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탄현면이 일탄면과 이탄면으로 분리된 후로는 일탄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4년 식민지배하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송탄면 신장리가 되었다.

광복후, 송탄면은 1963년 1월 송탄읍을 거쳐 1981년 송탄시로 승격될 때, 제역, 남산터, 목천, 구장터는 신장1동으로 신장, 밀월, 송월은 신장2동으로 분리되었다. 송탄시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숯고개도 신장동에 속하였으나, 1981년 시로 승격되면서 송북동으로 통합되었다.
1995년 5월 10일 송탄시가 평택시로 통합되면서 현재는 행정상 평택시 신장1동, 신장2동이 되었다. 구 터미널부터 옛 땡땡 거리를 지나 부대정문을 중심으로 1동, 아래로는 2동으로 구분된다.

개편 된 주소의 길이름에서 마을 이름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장(新場)의 유래에 대한 두 가지 설
  • 진위천변에 섰던 장(구 장터)이 새로운 장터로 옮겨오면서 생긴 지명으로 보인다. 경부선 철도와 1번 국도가 개설되면서 유통로가 변경되어 새 장터가 등장하였고 ‘신장’이란 지명이 새로이 생겼다는 설이다. 신장이라 불렸던 지역은 지금의 중앙시장으로 1960년대까지는 5일장이었다가 상설시장으로 발전하였다.
  • 한국 전쟁 이후 미군기지가 들어서고 인구가 늘자 새로운 장이 형성되었다는데서 동 이름이 유래했다. 기지촌의 등장과 신장이란 지명이 함께 발전하였다.

신장동의 마을유래

신장동의 마을 유래

남산터(南山―), 지골, 짓골

1∼6·11·12·16·17통의 마을 이름. 남산터는 16세기 중엽 최수성이라는 인물이 남산이라는 야트막한 산기슭에 원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칩거하였던 곳이다. 최수성은 당시 조광조, 김정, 최자반 등 당대의 유명 인물들과 교우하면서 학문을 닦았으나 정치입문에 뜻을 접고 스스로 북해거인 또는 경포 산인이라 하여 원정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의 칩거는 "산수에 묻혀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삶"이었다. 조광조의 개혁 당시 원정은 개혁세력의 결집장소였다. 그와 같은 역할 때문에 남곤, 최세절같은 훈구세력의 미움을 샀다. 결국 기묘사화로 조광조, 김정 등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 뒤이어 일어난 신사무옥으로 최수성도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최수성의 죽음은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사면, 복권되었다. 명분과 실력에서 앞섰던 사림파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사림파의 실권장악은 기묘명현의 명예회복을 의미했다. 후에 사림파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율곡이이의 건의에 따라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좌의정에 추증된다. 지금은 미군부대에게 내어준 남산은 이렇듯 평택지역에서 정신사적으로 귀한 산이었다.
남산터 마을은 땅이 질어서 "지골, 짓골"이라고도 불렸다. 이 마을은 지금도 전통마을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제역(除役洞), 젯골

제역동은 조선시대 농민들이 국가에 부담하는 역(役)을 면제해주고 대신 문정공 최수성의 묘와 사당을 관리하게 했던 마을이다. 미군부대가 들어오고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작은 농촌이었던 이 마을도 도시화되었다.

목천동(木川洞), 나무내

1·8·9·13·15통의 마을 이름. 목천(木川)은 ‘나무내’라고도 불렸다. ‘나무내’는 글자 그대로 ‘나무가 떠내려 오는 냇가 마을’ 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 옆에는 작은 내가 흐르는데, 장마철 냇가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떠내려 오곤 했다. 땔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 떠내려 오는 나무는 귀한 재산이었다. 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건져 햇볕에 말려 땔감으로 썼다.

구장터(舊場―)

10통의 마을 이름. 구장터는 옛 장터가 있던 마을이다. 19세기 말 일탄면 시절에는 면(面)의 중심이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마을의 모양과 골목길의 형태 그리고 길 좌우로 늘어선 집들의 모양이 옛 장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장터는 육로나 수로 교통과 관련이 깊다. 구장터 마을 옆에는 진위천이 흐르고 냇가에는 나루가 있었다.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에는 조수(潮水)가 구장터 옆을 지나 오산천을 타고 갈곶리 부근까지 올라갔다. 물길이 열린 곳으로 소금과 새우젓을 실은 배들이 왕래하였고 각종 물화가 교역 되었다. 하지만 구장터의 영화는 구한말 장터가 봉남리로 옮겨가면서 시들해졌다.

밀월동 (密月洞)

6∼12통의 마을 이름. 한국전쟁 이후 새로이 형성된 마을로 수풀이 우거진[密] 곳으로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月]이 아름답다고 해서 유래했다고 한다.

송월동 (松月洞)

13∼23통의 마을 이름.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마을로, 소나무 숲[松] 사이로 비치는 달[月]이 아름답다고 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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