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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신성장 경제신도시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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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신성장 경제신도시 평택

역사문화

지역유래

지역유래

  • 역사문화
  • 지역유래

평택의 지명유래

비전동
  • 마을이 큰 비(碑)가 있는 앞[前]에 있었다 하여 유래하였다고 한다. 덕동산 기슭에 있던 부처골의 비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는 그 비가 대동법시행기념비일 수도 있다.
세교동
  • 세교(細橋) : 예전에 평택을 가기 위해 통복천을 건너는 길고 가느다란[細] 다리[橋]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평동
  • 신평(新平) : 경부선 철도가 건설된 이후 현재 평택역의 남쪽에 시가지가 형성되었으나 1946년 대홍수를 겪고난 뒤 이전 논의가 일어나고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도시 계획에 따라 현재의 지역에 새로이 시가지가 형성된 곳이라는 뜻에서 지어졌다.
원평동
  • 원평(原平) : 경부선이 부설되고 평택역이 생기면서 시가지가 형성된 곳으로 대홍수 이후 수리에 문제가 있어 경부선 동쪽으로 역과 시가지가 옮겨지기 전까지 예전[原]에 평택의 중심지가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통복동
  • 통복(通伏) : 예전에 통보(通洑)라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는데 뒤에 통복보로 바뀌면서 이 지역의 이름에 통복이 붙기 시작하였다.

송탄의 지명유래

서정동
  • 예전 양성현에 속하였을 때 서쪽[西]이었고 물맛 좋은 우물[井]이 있었다 하여 유래했다고 하며, 400여 년전에 화강암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틀이 현존한다.
  • 현재 행정구역상 서정동은 송탄읍이 시로 승격하고 동을 나눌 때, 서정동의 주요지역이 번지상 서정 ○○○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정해진 것으로, 실제 동명의 유래가 된 서정리는 중앙동에 속한다.
송탄동
  • 가재(佳材) : 마을이 위치한 산의 모양이 가재와 같다고 해서 유래했다고 한다.
  • 도일(道日) : 여좌울·여좌월 또는 되일리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 모곡(茅谷) : 1통의 마을 이름. 마을 옆을 지나는 도일천 변에 띠풀이 무성하였으므로 띠풀[茅]이 많은 고을[谷]의 의미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 장안말(長安―) : 오래 전에 장터거리가 있었으므로 ‘장터안 마을'이란 뜻의 장안말이 되었다고 한다. 한자는 별 의미 없이 그것을 음차한 것 같다.
  • 칠괴(七槐)
    • 예전에 이 마을 공동우물 주변에 7그루의 느티나무[槐]가 있었는데, 그 나무의 신령으로 7장사가 태어났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 마을에 7개의 느티나무 정자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 칠원(七院)
    • 9통의 마을 이름. 본래 갈원(葛院)으로 불리다가 조선말기에 칠원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삼남대로에 위치하여 국가에서 운영하는 숙박소인 원이 있던 곳으로 주변에 칡이 많아 명칭으로 삼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말기의 어느 왕이 각 고을을 순례하다가 갈원에서 머물렀는데, 병이나 그 원인을 따지니 칡 때문이었다`―`혹은 지병이 나았다고도 한다`―`하여 그 이후부터 칠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칡은 한자로 갈이므로 갈원은 마을의 특징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고, 칠원은 음차한 것이다. 한편 갈왕골 또는 갈왕굴이라는 명칭은 칡이 무성한 고을이라는 뜻이다.
신장동
  • 한국 전쟁 이후 미군 기지가 들어서고 인구가 늘자 새로운[新] 장[場]이 형성되었다고 유래했다고 한다.
  • 구장터를 대신하여 들어선 새로운[新] 장터[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중앙동
  • 이충(二忠)
    • 조선 중종대 충신 조광조(趙光祖)가 이곳에서 소년기를 보냈고 인조대의 충신 오달제(吳達濟)의 옛 집이 있었기 때문에 두 충신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라는 뜻.
  • 장당(獐堂
    • 이곳에 있는 산이 노루[獐]의 형상이고 근처에 인가[堂]가 있다 하여 지었다고 한다.
  • 중앙
    • 1981년 7월 평택군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되면서 시의 중앙에 있었으며, 시청사가 중앙마을에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고덕면의 지명유래

궁리
  • 궁리(宮里) : 마을에 궁전 같은 큰 집이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당현리
  • 고려시대 말부터 마을 뒷산에 성황당이 있어 당고개[堂峴] 또는 당밑`─`당아래의 뜻`─`으로 불리었다. 얼마전까지 당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 예전에 고개[峴] 너머에 서당[堂]이 있어서 ‘글당이'라고도 한다.
동고리
  • 동고(東古) : 고덕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청리
  • 동청(東淸) : 동쪽[東]에 맑은 물[淸]이 흐른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두릉리
  • 지리적으로 마을 앞에 큰 두릉축이 있었다 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 마을 앞의 언덕[陵]이 울창한 숲으로 막혀[杜]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문곡리
  • 문곡(文谷) : 예전에 글을 좋아하고 학식있는 문사(文士)들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방축리
  • 방축(防築) : 예전에 방죽 즉 물을 막는[防] 축대[築]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염리
  • 여염(余染) : 여씨(余氏)가 처음 살면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율포리
  • 율포(栗浦) : 예전 양성현에 속하였고 황구지천에 인접한 포구[浦]로서 주변에 밤[栗]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좌교리
  • 좌교(坐橋) : 마을 앞 얕은 개울에 앉은[坐] 다리[橋]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해창리
  • 해창(海倉) : 예전에 이곳은 바다[海]에 인접하였으며 주변 지역의 조세를 모아 보관하다가 서울로 조운(漕運)하기 위한 창고[倉]가 있었다.

포승면의 지명유래

내기리
  • 내기(內基) : 예전에 함평이씨 이중길(李仲吉)이란 학자가 개성에서 이주해와 이곳 안[內] 터[基] 마을에 정착하였으며, 뒤에 안쪽 마을이란 뜻의 안터가 한자식으로 표기되면서 내기리가 되었다고 한다.
도곡리
  • 도곡(道谷) : 마을 앞 불당산(佛堂山)에 절이 있었고, 그곳의 승려들이 수도하였기 때문에 도를 닦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만호리
  • 만호(晩湖) : 예전에 만포(晩浦)라는 포구가 있었으며 호서[湖] 지방인 충청도와 바다를 두고 맞닿아 있어 두 글자를 합하여 지었다고 한다.
방림리
  • 방림(芳林) : 고려말에 함양(咸陽) 박씨가 정착하여 살았는데, 소나무 숲[林]이 울창하고 아름답다는[芳]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석정리
  • 석정(石井) : 마을이 처음 생길 때 먹을 물을 찾아 여러 군데를 파보았는데 서쪽편 돌[石]에서 좋은 물[井]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영리
  • 신영(新榮) : 옛날 이곳에 면사무소와 장터가 있었는데, 그 장터가 새롭게[新] 번영[榮]하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원정리
  • 원정(遠井) : 예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때 가까운 데서 식수를 구하기 어려웠으나 아주 먼[遠] 곳에서 맑고 깨끗한 샘을 찾아 그것을 우물[井]로 이용한 데서 마을의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홍원리
  • 홍원(洪原) : 조선시대에는 홍원(弘原)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지역은 3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곶지역으로 목초지가 있었고 그곳에 군마를 놓아 길렀다고 하는데, 넓은[洪] 들[原]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희곡리
  • 희곡(希谷) : 마을이 평야지대에 있어 산골짜기[谷]가 드믈었다는[希]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덕면의 지명유래

권관리
  • 권관(權管) : 예전에 이 마을에 권세를 부리는 아전배(衙前輩)들이 살아 권관(權官)이라고 하다가 뒤에 권관(權管)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기산리
  • 기산(岐山) : 현덕면 남부에 있는 옥녀봉(玉女峰)이 우뚝 솟아 있는 산(山) 줄기가 갈라진 곳[岐]에 마을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대안리
  • 대안(大安) : 예전부터 마을에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 많고 인심이 좋아 길손이 들면 집집마다 사랑방에 머물며 대접을 잘 하였기 때문에 이 만큼의 생활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크게[大] 편안[安]하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덕목리
  • 덕목(德睦) : 고려말 조선이 건국하자 두문동에 은거했던 어촌(漁村) 공부(孔俯) 선생이 조선왕조에서 벼슬하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이 마을로 와서 살게되었는데, 그가 덕행(德行)과 화목(和睦)을 강조했다는 데서 덕목이라고 마을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도대리
  • 도대(道垈) : 마을 앞 갯고랑에 고목나무가 한 그루가 있어 마치 배의 돛대와 같았으므로 마을 이름을 돛대라고 하다가 도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방축리
  • 방축(防築) : 마을 앞에 바닷물을 막는 방축을 쌓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운정리
  • 운정(雲井) : 마을의 형상이 구름 속의 반달 모양을 닮았고, 마을에 큰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차고 시원하며 우물 둘레에 항상 안개가 서려 있어 구름이 덮혀 있는 듯하기 때문에 구름[雲]과 우물[井]을 따서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광리
  • 인광(仁光) : 예전부터 농가 10여호가 오순도순 살면서 어질고[仁] 착하게 살아서 그 빛[光]이 영원하기를 소원하여 인광으로 마을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장수리
  • 장수(長水) : 처음에 두메라고 불리다가 그 뜻이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이름을 고쳤는데, 마을 옆으로 바다가 있어 길게[長] 물[水]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화양리
  • 화양(華陽) : 예전에 마을이 생기던 해에 주변 마을은 장마가 지속되었으나, 이 마을은 비가 자주 오지 않고 해가 자주 났으므로 햇볕[陽]이 잘 드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황산리
  • 황산(黃山) : 마을이 야산지대[山]에 있으며, 처음에 황씨[黃]가 정착해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안중리(安仲里)라고 불렸다고 한다.

서탄면의 지명유래

금각리
  • 금각(金角) : 마을의 지형이 소뿔[牛角]처럼 되어 있다고 하여 쇠뿔이 되고 쇠가 다시 쇠[金]로 바뀌었으며 한자로 표현되면서 금각리가 되었다.
금암리
  • 금암(金岩) : 마을의 지형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며, 마을 옆 산에 북바위라는 암석이 있으므로 두 가지 특징을 따서 금암이라 했다고 한다.
내천리
  • 내천(奈川) : 급한 일로 이곳을 지나던 길손이 마을 서쪽에 있는 황구지천을 건너려다가 물살이 세고 험하자 망연히 서서 “어찌하리오[奈何]”라고 탄식하였으므로, ‘어찌[奈] 개울[川]을 건너리오'라는 뜻으로 내천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두리
  • 마두(馬頭) : 서탄면의 전체적인 형상을 보면 이곳이 말의 머리부분에 해당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밖에 금암리는 심장부, 사리는 꼬리, 회화리는 앞발, 적봉리는 뒷발에 해당된다고 한다.
사리
  • 사리(寺里) : 예전에 절이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수월암리
  • 수월암(水月岩) : 전설에 의하면 한 청춘과부가 독수공방으로 기나긴 밤을 지새기 어려워 마음을 달래다가 고아한 달밤에 산밑을 구비쳐 흐르는 냇물에 비치는 달무리에 취하여 읊은 시에 “개울물[水]은 바위[岩]를 구비쳐 흐르는데 둥근달[月]은 고요하다” 라고 하였으며 이것을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장등리
  • 장등(長登) : 예전에 큰 홍수가 있을 때 황구지 일대의 사람들이 물난리를 피하여 이곳 긴 능선지대로 옮겨 왔다가 정착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적봉리
  • 적봉(赤峰) : 마을 산봉우리의 흙이 황토색이며 산에 나무가 나지 않아 적봉리라고 했다.
황구지리
  • 황구지(黃口池) : 진위천과 오산천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였으며 예전에 항곶포(亢串浦)가 있었는데, 항곶이 또는 항고지가 되며 뒤에 음운이 변화하면서 황구지로 바뀌었다고 생각된다.
  • 홍수 때면 누런 흙탕물로 땅도 누렇게 된다하며 습지에다 물결에 패인 웅덩이가 곳곳에 있어 누런[黃] 물색을 띤 하구(河口)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회화
  • 회화(檜花) : 마을에 회화나무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진위면의 지명유래

가곡리
  • 가곡(佳谷) : 마을의 산과 골짜기[谷]가 아름다워[佳]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갈곶리
  • 갈곶[葛串] : 이 마을은 높은 산맥이 뿌리를 내려 길게 뻗어나간 칡덩쿨[葛] 같다 하여 유래했다고 한다.
  • 오산천변에 위치하여 곶(串)이 형성된 지역이어서 갈곶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나루터가 있었다.
견산리
  • 견산(見山) : 이 마을에는 고구려 때의 토성이 있었고, 성에 견적대(見敵臺)라는 망루가 있어 사면을 볼 수 있다 하여 유래했다고 한다.
고현리
  • 고현(高峴) : 마을에 높은[高] 재[峴]가 있던 데서 유래한 것 같다.
동천리
  • 동천[東泉] : 마을에 좋은 샘[泉]이 있고, 동쪽[東]에 물이 마르지않는 전답이 있어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 옛부터 마을 동쪽에 있는 전답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풍년이 든다하여 유래했다고 한다. 동쪽[東]에 있는 전답에는 샘[泉]에서 물이 나와 가뭄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지어진 듯하다.
마산리
  • 마산(馬山) : 조선시대 진위현 마산면 지역이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914년 북면과 통합되면서 리가 되었다.
봉남리
  • 봉남(鳳南) : 무봉산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
신리
  • 신리(新里) : 벌판에 새로이[新] 형성된 마을[里]이라는 뜻.
  • 조선시대에 장호원이 있었다고 한다.
야막리
  • 야막(野幕) : 예전에 유민이 이곳에서 전답을 개간하기 위해 넓은 들판[野] 가운데 막[幕]을 치고 살았다 하여 유래했다고 한다.
은산리
  • 은산(銀山) : 마을에 은을 캐던 은구덩이가 있던 산이라 하여 유래했다고 한다. 봉화정씨가 처음 터를 잡을 때 산신령이 나타나 이 산에 머무르라는 계시를 받았고 뒷산이 모두 은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청호리
  • 청호(淸湖) :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호역(菁好驛)이 있던 곳이라고 하는데, 뒤에 지금의 한자로 바뀐 듯하다. 산과 숲이 우거진 곳에 맑고[淸] 아름다운 호수[湖]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북리
  • 하북(下北) : 고구려 때 축성된 (부산현는 부성현) 산성의 북쪽 아래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 1번 국도와 철도가 놓이면서 생긴 마을로 진위천[河] 북쪽[北]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가 한자가 변화한 것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청북읍의 지명유래

고렴리
  • 고렴(古念) : 예전 이곳에는 감미면(甘味面) 사무소가 있었던 곳으로,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면사무소가 이전하게 되자 면사무소가 있었던 옛[古]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念]하겠다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고잔리
  • 고잔(高棧) : 마을이 해안과 접하여 갯고랑의 높은[高] 잔다리[棧]를 건너다닌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 고려시대 서울에서 벼슬하던 한 양반이 낙향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왕이 계시던 서울을 못잊어 높은 곳에 올라가 서울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봉리
  • 백봉(栢峰) : 옛날 이곳에는 잣나무[栢] 숲이 울창한 봉우리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삼계리
  • 삼계(三溪) : 지리적으로 세[三] 갈래의 계곡[溪]에서 흐르던 물이 이 마을에서 만나 합쳐져 서해로 흐른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소리
  • 어소(魚沼) : 예전에 연못[沼]에 있었고 이곳에서 물고기[魚]를 길렀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연리
  • 어연(魚淵) : 마을 앞에 큰 연못[淵]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각종 물고기[魚]들이 많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옥길리
  • 옥길(玉吉) : 예전 이 마을 사람들이 조개잡이를 하여 생계를 이어왔는데, 조개껍질이 다양하게 아름다워 마치 옥(玉)과 같았고, 마을 사람들이 길하게 잘 살자는 뜻에서 옥길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율북리
  • 율북(栗北) : 마을에 밤나무[栗]가 울창하여 밤이 많이 났으며, 청북읍의 북쪽[北]에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토진리
  • 토진(土津) : 예전에 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고 나루터가 있어 길손들이 왕래했으며 그 나루터 이름이 톳[土]나루[津]였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산리
  • 한산(閑山) : 처음에는 한미한 곳이라하여 한미라고 하다가 식민지시대부터 갯가의 한미한[閑] 산턱[山]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한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현곡리
  • 현곡(玄谷) : 한자상의 뜻은 깊은 골짜기인데,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후사리
  • 후사(後寺) : 예전에 큰 절이 있었으며 신도가 많아지면서 절[寺] 뒤[後]에 마을이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팽성읍의 지명유래

객사리
  • 객사(客舍) : 평택현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관청을 찾아오는 벼슬아치나 양반이 묵던 숙소인 객사가 있었던 곳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근내리
  • 근내리(近乃里) : 그네리를 한자로 옮긴 것.
남산리
  • 남산(南山) : 평택현 관청 남쪽의 산에 있던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내리
  • 내리(內里 : 옛 아산현 읍내면의 중심지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 옛 백제시대 하팔현의 읍치(邑治)였던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노성리
  • 노성(老成) : 1934년 행정구역 변경 때, 노중리, 노상리와 신성리가 합치면서 노중·노상의 ‘노'와 신성의 ‘성'을 따서 마을 명칭을 지은 데서 유래하였다.
노양리
  • 노양(老陽) : 경양면(慶陽面)의 인처리(仁處里)·노산리가 합치면서 노산리의 ‘노'와 경양의 ‘양'을 따서 마을 명칭을 지은 데서 유래하였다.
노와리
  • 노와(老瓦) : 예전 아산현의 ‘노연리(老連里)'와 ‘와야리' 두 마을이 합쳐지면서 각각의 첫 자를 따온 것.
대사리
  • 대사(大沙) : 조선초기에 형성된 포구를 낀 마을이었는데, 모래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대추리
  • 대추(大秋) : 개펄을 간척한 토지에서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산리
  • 한산(閑山) : 처음에는 한미한 곳이라하여 한미라고 하다가 식민지시대부터 갯가의 한미한[閑] 산턱[山]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한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도두리
  • 도두(棹頭) : 『여지도서』 등에는 도두정(棹頭亭)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 입구에는 도두암(棹頭巖)이라는 높은 바위벼랑이 있다. 이곳에는 성리학자인 우남양(禹南陽) 처사가 살고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벗이었던 홍익한이 심양에서 순절한 것을 알고 벼랑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하였다 하여 부술 돈(頓)과 머리 두를 따서 돈두정리(頓頭亭里)라고 하였다. 그 후 행정 개편 때 서해의 조수가 드나드는 곳으로 돛단배가 왕래하였으므로 돛대란 뜻의 ‘도'와 돈두암에 얽힌 사연의 ‘두'를 따서 도두리라고 고쳤다고 한다.
  • 옛날에는 마을 앞이 바다와 갯벌로 이루어져서, 지형이 돛대머리와 같다고하여 도두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창리
  • 동창(東倉) : 옛 하팔현의 중심 읍내로 내리라고 하였으며, 또는 서면 내리라고도 하였다. 내리의 동쪽에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듯하다.
두리
  • 두리(頭里) : 마을 입구의 산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으로 마을이 소의 머리[頭]에 해당한다 하여 유래했다고 한다.
두정리
  • 두정(斗井) : 두곡리와 월정리를 합치면서 새로 지은 명칭이라고 한다.
본정리
  • 본정(本井) : 예전의 본언리(本堰里)와 경정리(鯨井里)의 일부가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명칭 가운데 ‘본'과 ‘정'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수리시설인 제언이 있었다고 한다.
석근리
  • 석근(石斤) : 석교리와 서근포 마을이 합쳐지면서 두마을의 명칭 가운데 ‘석'과 ‘근'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석봉리
  • 석봉(石峰) : 흑석리(黑石里)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안성천 하류에 서해안 개펄과 접하는 곳에 있다. 마을에 홀로 떨어진 자그마한 산봉우리가 물결을 타고 앉았는데, 그 곳에 검은 돌이 있다 하여 흑석리라고 하였다. 뒤에 검은 돌이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석봉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 흑석리와 원봉리가 합쳐지면서 ‘석'과 ‘봉'을 떼어 지었다고도 한다.
송화리
  • 송화(松花) : 송중리(松中里)·송하리(松下里)·개화리(開花里) 등 세 마을이 합쳐지면서 ‘송'과 ‘화'를 따서 지은 명칭이라고 한다.
신궁리
  • 신궁(新宮) : 신흥리(新興里)와 하궁리가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명칭 가운데 ‘신'과 ‘궁'을 따서 이름지었다고 한다.
신대리
  • 신대(新垈) : 새로이[新] 터[垈]를 잡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후기 마을이 새로 생기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신호리
  • 신호(新虎) : 호치 마을과 신촌 마을이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명칭 가운데 ‘신'과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안정리
  • 안정(安亭) : 안현리(鞍峴里)와 서정자(西亭子) 마을이 합쳐지면서 두 마을 명칭의 ‘안'과 ‘정'을 따서 안정리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鞍'이 ‘安'으로 바뀌었다.
원정리
  • 원정(院井) : 고려 때 이곳 탑상골에 있었던 원정사(院井寺)란 곳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온양 방씨 시조가 정착하면서 절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 이 마을에 좋은 물이 나는 우물이 있어 그 이름을 마을 명칭으로 하였다고 한다.
추팔리
  • 추팔(秋八) : 『여지도서』에는 추팔리(楸八里)로 기록되어 있다. 여덟 곳의 마을에서 물이 흘러들어와 매년 풍년을 맞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평궁리
  • 평궁(坪宮) : 상평리와 상궁리가 합쳐지면서 두 마을 명칭 가운데 자인 ‘평'과 ‘궁'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함정리
  • 함정(咸井) : 함등촌(咸登村) 또는 함정촌(咸?村)과 경정리가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함'자와 ‘정'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안중읍의 지명유래

금곡리
  • 금곡(金谷) : 마을의 형상이 소가 누워있는[臥牛] 형태라 하여 소골[牛谷]이라 하다가 쇠[金] 골이 되면서 금곡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반리
  • 대반(大盤) : 마을의 형상이 큰[大] 밥상[盤]과 비슷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덕우리
  • 덕우(德佑) :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덕으로 도우라는 뜻이다
삼정리
  • 삼정(三井) : 마을에 세[三] 개의 큰 우물[井]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 이 마을에 왕자봉(王子峰)이라는 산이 있는데, 삼정승이 나올 형세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산세를 끊어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성해리
  • 성해(城海) : 포승면 석정리였다가 안중면이 생기면서 새로이 만들어진 마을인데, 성외(城外) 마을과 해조(海潮) 마을로 구성되었으므로 두 마을의 앞 글자를 따서 성해로 지었다고 한다.
송담리
  • 송담(松潭) : 예전에 현덕면 인광리였는데 안중면이 생기면서 행정리가 되었다. 소나무 숲[松]이 우거진 곳에 연못[潭]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안중리
  • 안중(安仲) : 예전에 직산 장터가 현덕면 황산리에 있었는데, 그곳의 양반인 동래(東萊) 정씨가 장사치들을 천대하여 내쫓자 추방당한 보부상들이 이 마을에 장터를 이루고 안중시장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용성리
  • 용성(龍城) : 예전에 용성현(龍城縣)의 치소(治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그 흔적이 없으나 예전에 어느 재상이 용(龍)의 형상으로 성(城)을 쌓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학현리
  • 학현(鶴峴) : 마을에 연못이 있었으며, 이 연못 언저리 나무에 학이 많이 깃들어 있어 유래했다고 한다.
  • 마을의 형상이 학과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화
  • 현화(玄華) : 처음에 현덕면 화양 3리와 4리였다가 뒤에 안중면이 독립하면서 행정리가 설치되자 본래 현덕면(玄德面) 화양리(華陽里)였으므로 그 앞자를 따서 현화리라고 했다고 한다.

오성면의 지명유래

교포리
  • 교포(橋浦) : 예전의 갯가 마을로 포구[浦]가 있었으며, 지대가 낮아 바닷물이 많이 들어 작은 쪽다리[橋]를 놓고 통행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길음리
  • 길음(吉音) : 뒷산에서 이상한 소리[音]가 나면 마을에 좋은[吉] 일이 생기므로, 그 소리를 고대하면서 ‘길음'이라고 마을 이름을 정하였다고 한다.
당거리
  • 당거리(堂巨里) : 예전에 이 마을에는 큰[巨] 집[堂]을 짓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 보통 이런 마을 이름은 성황당이나 당집이 있는 큰 거리에 붙여지는 경우가 많다.
숙성리
  • 숙성(宿城) : 마을의 형세가 자던 새가 수풀을 나서는 모양[宿鳥出林型]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리
  • 신리(新里) : 조수간만의 차이에 의해 생긴 터에 새로이[新] 생긴 동네[里]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안화리
  • 안화(安化) : 예전에 바닷가 마을로서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며 산턱이 씻겨 무너져 내려와 흙이 쌓이면서 마을의 터가 이루어졌는데, 처음 안씨네가 정착하여 살면서 안씨네[安]가 흥성[化]하자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양교리
  • 양교(梁橋) : 이 마을은 지대가 낮아 사방으로 나무로 만든 징검다리[梁橋]를 놓고 건너 다녔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죽리
  • 죽리(竹里) : 예전 이 마을에 대나무숲[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창내리
  • 창내(倉內) : 흙을 파서 둑을 쌓은 형태를 창이라 하는데, 이후 이곳의 안쪽에 마을이 생겼났으므로 창[倉]의 안쪽[內]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본래 버들과 갈대가 무성한 곳에 갯벌 굴착공사를 해서 새긴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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