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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면

유래(연혁)

  • 오성면 소개
  • 유래(연혁)

오성면 유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 구한말 진위군에 속해있던 고두면의 일부, 즉 신리.공대,교포,안화리와 수원군에 소속되었던 오정면과 숙성면 일원, 포내면의 학현 리, 청용면의 강길리 일부, 현덕면의 구복리 등을 병합하여 1938년 오정면의 오자와 숙성면의 성자를 따서 오성면이라 칭하였다.

1987년 7월 1일 5개리 18개 마을이 평택군 안중출장소로 분리되어 현재의 9개 법정리와 36개 행정리로 구성된 오성면을 형성하였으며, 1995년 5월 10일 통합 평택시 발족으로 평택시 오성면이라 불리어 오고 있으며, 사무소는 오성면 숙성시장길 23에 위치하고 있다.

宿城里
숙조출림형(宿鳥出林形)으로 새들이 나무에 깃들린 모양과 같다하여 잘숙 (宿)자와 梧城面名의 재성(城)자를 따서 宿城里라 하였다. 이 곳은 옛날 나루터로 李朝末엽까지만 해도 서병헌씨 집앞에 있는 枯木나무에다 배(舟)를 매어 두고 자 고 가는 酒幕거리였다고 전해오는 곳이나. 行政部落으로는 5個里로 區分되었다.
  • 행정1리:元宿城부락은 原初마을이라 하여 元宿城이라 한다.
  • 행정2리:大潮頭부락은 속칭「큰조머리」라고 한다. 西海 牙山灣에 접한 潮水가 드나드는 곳으로 큰 潮水가 닿는다 하여 큰조머리로 불러 漢字로 大潮頭로 표기를 했다.
  • 행정3리:小潮頭부락은 속칭「작은머리」로 불리운다. 大潮頭보다 아래에 있어 潮水물이 적다는 뜻에서 小潮頭라고 하였다. 150年前부터 鄭씨가 정착한 마을이다
  • 행정4리:宿新垈부락은 새로 생긴 마을이란 이름이다. 이곳에는 수령 300년된 홰나무와 약 500년된 홰나무가 있어 옛일을 말해준다. 그리고 서정관씨 집에는 둘레 3m, 길이 8m가량의 우물이 있는데 약 250여년전에 팠다고 하며, 서한수씨 소유로 약 120년된 토담 초가집과 전병철씨 소유인 약 120년된 5칸짜리 토담집이 있다. 또 약 150년전에 만든 소(牛)우물이 있는데 이무기가 소를 물어다가 우물에서 잡아 먹고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물이 펑펑 솟아나와 물을 잘 길을수가 없었다는 전설이 있는 이 우물은 1973년 경지정리로 매몰되었다고 한다.
  • 행정5리:市場부락은 1990년 9월 1일 元宿城 부락에서 분리되었고, 옛날 市場이 형성되었던 부락이었다.
橋浦里
이곳은 옛날 갯벌로 浦口였다고 하며 그후 地帶가 낮은곳에 마을이 생기 면서 어디를 가나 물로 통행이 어려워 쪽다리를 많이 놓게 된 것으로 인하여 갯벌과 다리의 상승으로 橋浦里로 불리웠다. 行政區域은 3個里로 區分되었다.
  • 행정1리:元橋浦부락은 속칭 다리께라고 한다.
  • 행정2리:松湖부락은 속칭「궁말」로 통한다. 사철 湖水가 소나무와 같이 푸르다는 뜻에서 松湖라고 하였으며 李朝말엽까지만 해도 100여호 정도로 번성하였던 것으로 피룩이나 활가게도 있었다 한다. 1922년 큰 홍수로 주민이 떠나가고 물이 빠지면 농사철에는 돌아오고 홍수가 나면 떠나가고 하였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 행정3리:越梁村부락은 속칭「들건너」라고 한다. 이 마을에 가려면 사방에서 개울을 건너야 하는 곳으로 월양촌으로 불렀다.
新 里
새로 생긴 洞里라는데서 新里라 한다. 行政區域은 4個里로 區分되었다.
  • 행정1리:三宮院부락은 속칭 舟橋浦라고도 하였다. 옛적에 큰집이 세채가 있었 다. 셋 宮闕같은 집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며 한때는 배(舟)가 닿았다 하여 舟橋 里로 불렀다.
  • 행정2리:新垈부락은 속칭「샛터」라고 하며 신리중에서도 더 새로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 행정3리:三洞村부락은 當初 세가구가 定着한 마을이라 하여 三洞의 家口를 表現 하여 三洞村이라 하였다.
  • 행정4리:中垈里부락은 속칭「中垈」한다. 약 70년전 원창마을과 삼동촌 사이의 中間부락에 위치한다고 부른 洞里이다.
安化里
비가 많이 오고 특히 홍수가 잦다고 해서 우다내(雨多川)라고도 하고, 옛부터 바닷가 조수가 드나들은 갯벌이어서 썰물 밀물이 심하여 그때 산턱이 씻겨 무너져 내려와 흙이 쌓이여 蓄積土를 이루어 마을의 터가 되고 처음으로 安氏네가 定着하여 살아 왔다고 하여 安氏네가 興盛하자는 뜻에서 安化里라고 불렀다.
  • 행정1리:원완화부락은 속칭「우다래」라 하며 원초마을이라 원안화리로 부른다.
  • 행정2리:松垈부락은 소나무 숲이 우거졌다 하여 松垈라고 한다.
梁橋里
이 마을은 사방으로 징검다리(잔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다 하여 나무다리 양(梁)字와 다리교(橋)字를 따서 지은 마을이며 행정구역은 6개리로 구분되었다.
  • 행정1리:元梁橋부락은 속칭「양다리」라고 하며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다.
  • 행정2리:古念부락은 속칭「삼태평」또는「태끌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약 40년전만 해도 장정 아람들이 재래종 소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무성하였는데 해방 후 우연히 없어졌다고 전하며 대각뿌리 또는 구래미라고 부르기도 하나 그 의미는 잘 알 수 없다.
  • 행정3리:新興洞부락은 속칭 분가촌(分家村)으로 부른다. 약 25년전부터 주민들 이 모여와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지은 마을이다.
  • 행정4리:大兼堂부락은 속칭 大兼堂 또는 큰말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마을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많았고 권문세도가와 예절을 숭상하는 문장가들이 살았다 하여 노복까지 기와집을 지어 주었다 하여「큰말」이다. 이에 大兼堂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 행정5리:麗水부락은 속칭 汝術里 또는 문장자 고개라고도 한다. 샘물이 수려해서 맑은여(麗)字와 물수(水)字를 따서 지은 洞名이고 여술里라 함은 어음이 변하여 진 이름이다. 문장(文章)고개라 함은 옛날 이 마을에는 富者 文章家들이 있어 과객 들의 출입이 귀찮을 정도였다. 어느날 한 대사(스님)가 시주를 청하러 왔는데 문장가는 우리집에는 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와 피로하다고 하였더니 대사 말이 새터앞의 山 허리를 끊고 내(川)를 방울미 앞으로 돌리면 지나가는 손님이 뜸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문장가는 대사가 말한 대로 산허리를 끊으니 피가 흘러 나왔다고 하며 그 후 문장가는 패가를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니「문장자고개」라 고도 한다.
  • 행정6리:新基부락은 새로 생긴 부락이라 하여 新基里로 하였다. 이 마을에는 兄弟山이 있다. 兄弟峰으로도 부르는데 두 봉우리가 꼭 형제같이 닮았다 한다. 梁橋2里에 수령 약 100년된 대추나무가 있으며 4里에는(마을 東편) 수령미상인 (고려때부터 내려오는)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풍운을 겪고 있다. 5里(西편)에는 兄弟峰이 있이 있는데 둘째 峰위에는 높이 3m, 둘레 5m되는 괴암이 있다. 약 300년 전부터 있었다는 이 바위는 林慶業장군이 앉았다는 곳으로 지금도 그 자리가 남아 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100년 된 고가들이 네채 나 있으며 4里에는 이대성, 김애현 소유로 된 옛적 진위현 때 면사무소로 사용하 였다는 연대 미상의 목조초가 9칸짜리와 8칸짜리의 2동이 존재하고 있다.
竹 里
옛적 이 마을에는 귀한 대나무(竹)숲이 있었다 하여 대나무골(竹里)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4개里로 區分되었다.
  • 행정1리:방울(防 )부락은「방울이」또는 小兼洞으로 부른다. 방울이라 부른 것은 마을 山이 매(鷹)에 방울이 달린 자리 모양에 동네가 위치했다고 방울로 한자음 표기는 防鷹이라 하였다. 방울은 소리가 나야 마을이 번성한다는 소원풀이로 장고와 북과 괭과리를 자주 쳐왔다고 한다.
  • 행정2리:新竹洞 부락은 속칭 기능골(긴능골) 또는「즘말」이라고도 부른다. 新竹洞은 竹里中에서 작은 마을이라 지은 이름이고 기능골은 지금의 梧城敎會에서 볼 때 보무들기(鳳舞들기), 봉이 춤추는 듯한 고개까지 긴 능선으로 되어 있어 유래된 속명이며 즘말이란 질그릇을 굽던 곳이 있었다 하여 즘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나가던 담배장사꾼을 잡아넣어 방죽 터지는 것을 막았다 하여「담배살 이방죽」이라는 전설도 있다. 이곳 2리에는 즘말山(400m)이 있는데 옛날 질그릇을 만들던 곳이라 하며 수령 200년된 老松이 서있다.
  • 행정3리:大竹부락은 속칭 댓골(대나무골)이라고도 불린다. 「큰 대나무골」로도 통한다.
  • 행정4리:小竹부락은 새로 생겼다는 마을이며 속칭「고군뱅이」또는「곰뱅이」로 부른다. 옛날에 곰이 살았다 하여 곰뱅이라 하였다 하며 이 마을에는 예부터 말 무덤이 있는데 전쟁터에 나갔던 애마가 죽어서 이곳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吉音里
뒷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 이 마을이 길(吉)하다는 뜻에서 그 소리를 고대하는 소원으로 吉音里라 하였다. 행정구역으로 3개里로 區分되었다.
  • 행정1리:元吉音부락은 속칭「계음리(鷄音里)」라고도 부른다. 계음리하고 부른 것은 일제시(1921년) 행정구역 명칭변경때 개명되었다. 그 사유는 이 마을이 닭 의 형상을 닮았다하여 계음리라 하였다 하며, 이 마을에는 1928년 韓氏네 2世代 가 土着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 행정2리:內塔부락은 塔안 동네라 하여「내탑」이라 한다.
  • 행정3리:美村부락은 속칭「미뻐」라고도 부른다. 1900년경부터 생긴 마을로 陽城縣에 속하였던 곳이기도 하여 양성말로도 불렀다. 이곳은 牙山灣의 바다와 접하여 潮水가 밀어닥쳐 썰물이 심하여 한 때는 1주야에 1㎞씩이나 포락이 되는 지변으로 폐동이 되었다가 복구된 동네라 한다. 밑 빠진 독이라는 격언의 뜻인지 미뻐라고 불렀다 하며 그 후는 바다와 산이 조화되는 경치가 좋은 마을이라 하여 미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여 온다. 이 곳에는 1리에 수령 약 100년된 소나무와 약 120년된 참나무가 마을의 애환을 되새겨 주는 듯 서있다.
堂巨里
예날 이곳에는 큰 집들이 많이 있었고 부유하게 살았다고 하여 집당(堂) 자를 따서 당(堂)거리 불렀다.
  • 길마원(吉馬院): 이 부락의 洞名은 약100여년 전에 지었다하며 간척사업을 할 때 소에다 길마(吉馬)를 지워 흙을 운반하였다하여 길마원이라 이름하였다는 유래가 있으며 속칭 길마지 라고도 한다.
  • 원당거(元堂巨): 이부락은 1800년경부터 큰집들이 많이 있었다하여 부유하게 살았 다고 하여 집당(堂)자를 따서 당거리라고 불렀고 일설에는 조선말에 큰당집이 있 어 그 당집에서 제사를 매년 성대히 지냈다는 유래도 있다.
  • 탑현(塔峴): 이 부락은 속칭 탑고개 라고도 한다. 옛날 고개넘어 절과 탑이 있었 다는데 지금은 절과 탑의 잔해가 눈에 뜨일 뿐이다. 탑과고개를 의미해서 탑(塔) 자와 고개현(峴)자를 따서 탑현리와 탑고개로 불렀다 한다.
創內里
창(흙을 파서 뚝을 쌓은 형태)을 타고난 다음에 그 근처의 안쪽으로 마을 이 생겼다고 해서 한자로 창대리로 불렀다. 이곳은 본디 버들과 갈대가 무성한 곳 으로 갯벌 굴착공사를 해서 개간을 하였다는 곳이다.
  • 원창내(元倉內)
  • 구창내(舊倉內): 이 마을은 한일합방이후 원창(元倉)마을에서 떨어져 새로 마을을 이룩하였다는데 원창내(元倉內)마을 주민들이 이사와 산다하여 구창내(舊倉內)라 한다.
  • 신창내(新倉內): 행정구역의 증가로 새로운 마을이 생겨나며 붙은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