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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중심 새로운 평택

평택시 인구2019년10월말 기준

읍면동

일반현황

  • 직속기관
  • 읍면동
  • 팽성읍
  • 일반현황

기본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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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을 면적, 인구, 세대수를 상세히 안내하는 표입니다.
행정구역면적인구세대수
72리 300반 1,421㎡ 27,839명 (남 14,218명, 여 13,621명) 14,946세대

교육시설

초등학교 4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 ☞ 세부현황[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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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읍 교육시설 초등학교 4개교(계성초, 부용초, 팽성초, 평택송화초), 중학교 1개교(청담중), 고등학교 1개교(청담고) 주소 및 연락처를 안내합니다.
명칭주소연락처
계성초등학교 평택시 계성새싹길 85 (우 17979) 전화 031-692-0149
팩스 031-691-4273
부용초등학교 평택시 동서촌로 65 (우 17988) 전화 031-691-5945
팩스 031-691-7081
팽성초등학교 평택시 송화2길 2 (우 17981) 전화 031-691-4135
팩스 031-691-7476
평택송화초등학교 평택시 송화택지로25번길 14 (우 17989) 전화 031-658-1454
팩스 031-658-1491
청담중학교 평택시 부용로56번길 20 (우 17991) 전화 031-691-9500
팩스 031-691-2321
청담고등학교 평택시 팽성송화로 192 (우 17991) 전화 031-691-7634
팩스 031-691-8096

공공복지시설

세부현황[클릭]

행정복지센터 행정조직

팽성읍의 조직도는 평생읍 하위로  총무팀, 생활지원팀, 민원팀, 산업환경팀, 개발팀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센터에서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인감증명서 발급 신청(대리)
  • 인감(개인) 신고 (본인)
  • 인감신고 (재외국민)
  •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
  • 주민등록 재등록
  • 주민등록 분실신고 및 재발급
  • 주민등록 정정(말소) 신고
  • 출생신고
  • 사망신고
  • 전입신고
  • 주택임대차계약서 확정일자 부여
  • 납세완납증명서 (지방세납세증명)
  • 지방세 미과세 증명
  • 자동차 시세완납 증명
  • 재산세 과세증명 (세목별 과세증명)
  • 민방위 교육
  • 기초연금대상자 신청
  • 노인교통수당 신청
  • 국민기초 생활보장 수급자 신청
  • 장애인 등록 신청
  • 공공근로신청
  • 농지원부 작성 등본발급업무

팽성읍 유래

원래 이곳은 고구려시대 팽성군 지역이며 조선시대 초기에 평택의 치소였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한 부군면 폐합시 평택군 읍내면 동면 서면을 병합하여 부용면이라 하고 평택군 서면 남면 경양면 동면 일부를 병합하여 서면이라 하였으나 1937년 행정구역 개편시 팽성면이라 불렀다.
1972년 9월 1일 평택군 조례 제330호로 평택군 안정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팽성면이 팽성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0년 2월 5일 평택군 안정출장소를 폐지하고 팽성읍 안정출장소로 변경하였다.
명칭유래는 옛날 팽성군 지역임을 따라 이 고장의 전통성과 역사성을 전승하고자 팽성이라 하였다.

객사리(客舍里)

조선시대 평택현의 공해(公廨) 가운데 하나였던 객사가 있어 유래되었다. 객사(客舍)는 궁궐을 상징하는 전폐(궐폐)를 모셔두고 망궐레를 행하며, 공무(公務)로 지방을 여행하는 사신이나 전·현직 관리에게 숙소를 제공하였던 곳이다.

근내리(近乃里)

조선시대 충청도 평택현 지역이다. 마을이 안성천과 가까워 근내라고 불렀다는 설과, 마을의 형세가 그네와 같아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전자가 사실에 가깝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대로가 지나는 교통로에 위치한 데다 비옥한 경작지가 많아 해주 정씨가 동족마을을 형성하였다. 자연마을은 그네골과 안골로 구분되지만 안골의 가호 수가 적어 단일마을로 인식된다.

남산리(南山里)

조선시대 평택현 동면에 속했다. 남산(南山)이라는 지명은 평택현 관아의 남족 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어 유래되었다. 처음에는 남산리 한 마을 뿐이었지만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남산마을의 규모도 확장되었고, 귀농촌, 산직골, 사거리 같은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다.

내리(內里)

조선시대 평택현 서면의 중심마을이었다. 내리라는 지명은 안터가 면(面)의 중심마을이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산업은 농업이 주산업이며 성씨는 온양 방씨가 많지만 여러 성씨가 혼재되었다.

노성리(老成里)

고려시대에 경향현지역이었다가 조선 태조5년에 폐현되면서 평택현 남면에 속하였다. 노성리라는 지명은 노중과 신성에서 한 글자씩 빌려와 유래되었다. 중심들과 둔포천 변에 형성된 마을로 신성포구가 있고 나머지 마을은 개간사업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중리, 느새, 신성리 같은 마을이 있다.

노양리(老陽里)

고려시대에 경양현 지역으로 하양창이 있던 망르이다. 노양이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노하의 ‘노’와 경양의 ‘양’이 통합되면서 유래되었다. 계양은 경양은 별칭으로 근대 이전에는 경양포 앞 해구(海口)를 계양해구로 불렀다.

노와리(老瓦里)

조선시대 충청도 평택현 동면지역이다. 당시에는 노련동과 와야동 두 개의 마을로 편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련리와 와칠동을 통합하여 노와리라고 하였다.

대사리(大沙里)

조선시대에는 대사동이라고 하여 평택현 남면에 속하였고, 1895년 23부제 실시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진위군 서면에 편재되었으며, 1934년 서면이 부용면과 통폐합되면서 팽성면(읍)에 속하였다. 지명은 대삿골, 대사동, 대사 등으로 불려진다. 대사(大沙)라는 지명은 마을 앞 독천 변에 곱고 흰 모래밭이 펼쳐있어 유래되었다. 흰 모래밭은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사라졌고, 하천도 직강공사 등을 통하여 옛 모습을 잃었다. 한국전쟁 뒤 대사2리에 피난민 수용소가 형성되면서 2개 마을로 늘어났다.

대추리(大秋里)

조선후기 평택현 서면지역이었다. 단일마을로 경작지가 풍부하고 마을규모가 커서 대추리가 되었다. 1942년 일본해군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마을 일부가 수용되었고, 1952년 K-6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곤지머리로 집단 이주 당하였다. 그러다가 2007년 미군기지 확장사업으로 도두리 들과 마을이 수용되면서 주민들 일부가 흩어졌고 강제 이주를 거부하면서 끝까지 싸운 주민들 일부만 노와리에 이주단지를 조성하여 집단이주하였다.

도두리(悼頭里)

도두리는 근대전후 도두리들 일부가 간척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지명은 바닷가를 향하여 돛대처럼 길게 나와 있어 유래되었다. 마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두리들이 간척되자 인구가 급증하였고, 1950~60년대를 거치며 도두리들 가운데에도 도두2리가 형성되었다. 1980년대 이전에는 신대3리 장단마을과 신대4리 말랭이도 도두리에 속하였지만 나중에 신대리로 편입되었고, 근래 미군기지확장사업으로 도두2리까지 폐동되면서 이제는 도두1리만 남았다.

동창리(東倉里)

동창리는 조선후기 평택현 서면지였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위군 부용면에 속하였고, 1934년 서면과 부용면이 통합됨녀서 팽성면에 속하였다. 동창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평택현의 사창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본래는 마을 옆에 창리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간척과 조수의 영향으로 폐동된 것으로 보인다.

두리(頭里)

조선시대 평택현 읍내면에 속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누촌(다락말)과 북면의 근내리 일부를 통합하여 두리라고 하였다. 두리라는 지명은 두1리의 ‘머래’에서 왔다. 머래는 머리의 사투리로 부용산 줄기의 머리부분에 마을이 형성되어 유래되었다. 근대전후 마을 앞 간석지가 개간되면서 농업이 발달하였고, 근래에는 농업과 함께 회사원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두정리(斗井里)

조선시대에는 평택현 남면지역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두곡리와 월정리를 합쳐서 진위군 서면 두정리라고 하였다. 마을은 조선후기 계화리 간척지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졌다. 월정은 간척사업으로 농사터가 많다고 하여 큰농고지, 두곡리는 간척으로 더 큰 농지가 형성되었다고 하여 대농곡으로 불러지고 있다. 일설에는 큰농고지가 고종 때 도사벼슬을 지낸 이헌직이 낙향하여 굶주린 백성을 살리기 위해 곡식 수 백석을 풀어먹이면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본정리(本井里)

고려시대 경양현 지역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직산현 경양면 지역이었다. 본래 본언리와 경정리 일부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본정리라고 하였다. 본정2리는 본래 경정리 지역으로 사람이 살지 않다가 한국전쟁 때 K-6미군기지 후문에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마을규모가 커졌다. 아리랑고개라는 지명도 기지촌에 대한 은어였다가 마을지명으로 정착되었다.

석근리(石斤里)

석근리는 조선시대 평택현 남면지역이었다. 자연마을은 석다리와 서근보가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석다리와 서근보를 합하여 석근리라는 지명으로 만들어졌다.

석봉리(石峯里)

조선시대 평택현 북면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895년 23부제 실시로 서면으로 편재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흑석리와 원봉을 통합하면서 석봉리가 되었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흑석리를 중심으로 농업과 어업이 발달하였고 원봉을 중심으로 수로교통과 상업이 발달하였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수해가 심하였다. 1946년 물난리를 겪으면서 원봉마을까지 폐동되면서 현재는 흑석리를 중심으로 단일마을로 형성되었다.

송화리(松花里)

조선후기 평택현 남면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송당 상리·중리·하리와 개화리가 통합되면서 송화리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오고 뱃터가 형성되었지만 간척사업으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신궁리(新宮里)

조선시대 평택현 읍내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신흥리와 하궁리가 통합되면서 신궁리가 되었다. 안성천 변에 위치하여 수해를 많이 당했으며 신궁2리 함판마을은 1946년 물난리 때 마을이 떠내려가고 인명이 손실되었다.

신대리(新垈里)

조선시대 직산현 경양면 지역이었다. 본래는 마을이 없다가 조선 말기 도두리들 일부가 개간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 형성된 마을은 신대1리 새터이다. 그 뒤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피난민들이 신대2리 영창마을과 3리 장단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신대4리 말랭이는 한국전쟁과 1950~1960년대 도두리벌이 간척되면서 형성되었다.

신호리(新號里)

조선시대 평택현 읍내면 지역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촌 마을과 호치가 통합되면서 유래되었다. 자연지명으로는 새말과 범칫말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두 마을 앞으로는 바닷물이 들어오고 갯벌이 펼쳐졌다. 그러다가 3백여 년 전부터 갯벌이 간척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일제강점 전후에는 호치마을 주변이 간척되어 오늘과 같은 마을이 되었다.

안정리(安亭里)

조선시대에는 평택현 남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위군 서면에 통합되어 서정자와 안현의 안(鞍)과 정(亭)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안정리가 되었다. 그 뒤로 안(鞍)이 안(安)으로 바뀌면서 안정리(安亭里)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원정리(院井里)

조선시대 평택현 북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위군 부용면에 편재되었다. 1934년 부용면과 서면이 통합되어 팽성면이 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원정리는 마을에 맑은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어 ‘먼우물’로 불렸다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원정(遠井)이 되었다. 온양 방씨 동족마을로 정말, 응당말, 탑상골, 마른물, 진등 같은 자연마을이 있다.

추팔리(秋八里)

조선시대 평택현 동면(東面)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용면에 편재되었다. 조선시대 성환찰방에 소속되었던 화천역이 있던 마을로 역말, 추팔로 불렸던 것이 지명으로 굳어졌다.

평궁리(坪宮里)

조선시대에는 평택현 읍내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읍내면의 상궁리, 동명 상평리, 직산군 삼서면의 와우리 일부를 통합하여 궁평리라고 하였다가 마을 규모가 커지면서 평궁리가 되었다. 통한들 들판에 형성된 마을로 궁방전이나 역둔토, 왕족들의 토지가 많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동척농장 등 일본인 농장이 많았다.

함정리(咸井里)

조선시대 평택현 서면 경정리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함풍촌과 경정리가 통합됨녀서 함정리가 되었다. 일제 말에는 일본해군비행장 건설로 마을이 강제 이주당하였으며, 한국전쟁 중 K-6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인구가 증가하였다. 20여 년 전에는 본정2리 아리랑고개까지 통할하엿지만 분동되면서 마을 규모가 줄었다. 함정1리는 조선시대에 포의사(서원)가 있어 서원말이라는 지명으로 불려진다. 함정2리 말랭이는 본래 마을이 없다가 일제 말에 일시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1950~60년대 피난민들과 도두리들 간척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오늘날과 같은 마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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